문똥이의 시

우리 아버지

문똥이 2008. 8. 11. 16:19
         - 우리 아버지 -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전공과는 상관없이 여러 가지 재주가 많으셨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년시절부터 사진, 활동사진, 라디오, 무전기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는데 
지금 같이 무슨 학원에서 배운 것이 아닌 스스로 책을 보고 독학으로 깨우치신 것이다.
아버지의 10주기 추도사에서 경기고보 동창 어르신은 
당신네 졸업사진을 찍으셨다는 말씀도 하셨다. 
젊었을 때 찍은 사진첩을 보면 사진작가로 나섰다면 어떠셨을까 생각도 해 본다.
여러 종류의 카메라가 있었지만 
목에 둘러메고 조리개가 위에서 열렸다 닫혔다 하는 직사각형 사진기 
라이카, M3 M3는 "에므쓰리 에므쓰리" 하시면서 
카메라와 무비 카메라를 신형이 나올 때마다 바꾸시고 
늘 카메라와 무비카메라 등을 정성스럽게 닦곤 하셨다. 
그래 우리들은 '에므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름 인데 
60년대의 카메라 '에므쓰리'는 굉장히 좋은 카메라였나 보다. 
지금에야 카메라 등 작은 전자제품이 얼마든지 있지만 
첩보영화에 나오는 아주 작은 크기의 카메라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면서 흐믓해 하곤 하셨다.
 

[아버지가 찍은 1971년 1월에 미국 시카고 어느 카페와 밤 도시풍경]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 16mm 활동사진을 보았는데
증조할머니(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차의 뒷문이 양쪽으로 열리는 까만색의 영구차만 기억난다. 
어머니의 결혼 첫날밤 신방을 찍은 활동사진 동생은 보았다는데 어째 난 본 기억이 없고 
1930년대에 찍은 박연폭포등 여러 필름이 남아있고, 
어머니 말씀으로는 난리 통에 많은 것이 없어졌다 하신다.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의 우리들은  8mm 활동사진의 모델이었다. 
보통 풍물을 그대로 찍으셨지만 가끔은 달려 내려오라 하면 뛰기 시작하기도 했고 
아버지의 지시대로 행동 한 적도 많았다.(나의 8mm 결혼식 무비필름을 갖고 있다) 
우리들은 영사기 앞에 앉아 새로 편집한 활동사진도 보고 짧은 일본만화도 보곤 했는데 
찍은 활동사진의 필름을 편집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환등기로 보는 우리들의 슬라이드 필름 만 해도  무수히 많다. 
늘 보고 자라서인지 오빠는 방에 이불 두르고 사진 인화도 했고 
나는 그 옆에서 사진 자르는 것을 도와 주었다.
그리고 집안에는 라디오 만들 때 필요한 여러 가지 기기와 부속품들 
진공관, 스피커, 종이에 그리신 설계도면 등이 늘 곁에 있었다. 
때문에 6.25때 단파라디오가 다락에서 발견돼 잡혀가셨는데 
9.28 수복 직전 극적으로 살아 돌아 오셨다. 
6살 이었던 때의 기억인데도 새벽에 수돗가에서 
어머니가 쌀을 씻으면서 눈물 흘리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90이 넘으신 어머니는 "내가 그랬었나" 하시는 게 기억이 감감하신가 보다.

우리들은 또 앰프가 있는 전축으로 일찍부터 클래식과 팝송을 접하였다. 주로 클래식음악으로 오빠들 덕분에 자연스레 귀에 익어 교향곡 협주곡 등의 멜로디를 따라 불렀고 나도 베토벤의 전원, 영웅 등 교향곡악보를 오빠와 같이 보면서 각 악기가 들어갈 때 바쁘게 손가락으로 음표를 짚어 가면서 부르기도 했다. 악기는 다룰 줄 몰라도 여학생 수준으로는 누구 못지않게 어느 음악가의 무슨 곡이라고 곡명정도는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늘 클래식음악을 끼고 살았는데 어느 틈엔가 텔레비전에 빠져 요새는 무슨 곡이더라 한다. 텔레비전은 우리나라 방송국이 생기기 직전에 있었으니 아버지의 취미생활로 우리들은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는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자부 한다. 특히 전자 쪽으로, 부자는 아니 였는 데도 말이다. 당신의 취미생활 하시는 데 드는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 하셨다면 하고 후에 자식들은 말들 했지만. 또 여행을 즐겨 당신 혼자서도 방방곡곡을 다니셨고, 덕분에 언니와 동생들은 아버지와의 여행 추억담이 많은데 나는 대학기숙사에 있는 바람에 다 크고 난후의 추억은 별로 없다. 언니가 60년대 중반 무주 구천동 여행 이야기를 할 때 면 딸 중 나만 빠진 것이 아쉽기만 하다. 요즘같이 전자기기가 넘치는 시대 똑똑한 기계가 알아서 해 주는 편리한 세상 아버지가 계셨다면 캠코더 같은 것은 재미없다고 하셨을 것 같다. 아버지의 고급 취미생활 덕분에 일찍부터 문화적 혜택은 많이 받은 셈이다. 문학을 지향 한 것도 아니고 글을 써 본적도 없는 데 이렇게 '시인'으로 등단한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듣고 보고 했던 이 모든 것이 자양분으로 남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008. 8.5



              1972년  석가탄신일 , 북암에서

         
        아버지
        "토스카의  별이  빛나건만,
        돌아오라  쏘랜토로"를 
        즐겨  부르시던  아버지
        "개여울"  노래를 
        좋아하시던  아버지
        노래가  나올때면 
        내  나이  보다 
        훨씬  전에  가신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그  옛날  소년  시절부터
        카메라와   활동사진에
        그래서, 우리들은   늘
        아버지의  모델 이었다
        진공관과   설계도면을
        보아왔던   우리들은
        진품 명품  시간에
        진공관  라디오를  보고는
        아버지가  더 그리워진다
        수박을 반의   반을  잘라
        통째로  드셨고
        일부러  길가의  할머니  한테
        물건  사시던  아버지
        어렸을땐   어려웠던 아버지가
        점점 자라서는  가까웠던  아버지
        정말  멋 스럽고  속  깊은 
        아버지셨다
        아버지의  반의  반만  닮았어도...
                                           2007.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