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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春望詞 四首(춘망사 4수)/설도(薛濤)

문똥이 2018. 4. 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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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年作 薛涛制笺图 立轴 纸本 唐代聲名最盛的女詩人


春望詞


《春望詞》是一首五言古體詩,是唐朝女詩人薛濤所作,以四首聯章形式,抒寫眺望春景,卻心生複雜愁情,表達了詩人傷春之感相思之情。


作品原文


花開不同賞,花落不同悲。

欲問相思處,花開花落時。

攬草結同心,將以遺知音。

春愁正斷絕,春鳥複哀吟。

風花日將老,佳期猶渺渺。

不結同心人,空結同心草。

那堪花滿枝,翻作兩相思。

玉箸垂朝鏡,春風知不知。[1] 



創作背景

這首《春望詞》寫于薛濤隱居浣花溪時期。此時,她雖剛年過三十,卻已飽經人生滄桑。十二年屈辱的樂伎生涯中,她曾被罰往荒蠻邊關,也曾擁有過節度府校書郎的尊貴地位。在終于脫離了樂籍恢複了自由身後,她一身素淡的女冠服,在浣花溪畔開始了新生活。本該是高興的事,但是若無那有情人分享,便成了那“空谷幽蘭”“棧橋梅花”只能孤芳自賞,活脫脫透著一股淒涼。


作品賞析


詩句融情于景,開頭四句描繪花開花落之景,抒發相思之情。“花開不同賞,花落不同悲。”不管是花開還是花落,薛濤之情惟自知,此時最相思,相思無人解,何處話淒涼?悲矣!再看“攬草結同心,將以遺知音。”一句,“結同心”“遺知音”坦誠而直率地表露出薛濤渴求覓得有情郎“雙棲綠池上,朝暮共飛還”的心迹,可見其寂寞成殇飄零無依的現狀。緊接著又寫“春愁正斷絕,春鳥複哀吟。”僅一個“複”字,叫人不由得心生憐憫,對春光易逝的憂愁正要慢慢消退,奈何那無知春鳥又要在枝頭鳴叫提醒著世人又是一歲春光蹉跎,何其哀愁啊!從結構上看,詞句回答了上文的相思之所在,又很好地將下文過渡到描述感慨時光荏茬,待字閨中容顔老去的苦悶之情。薛濤通過“風花”“同心草”“花滿枝”“春風”等景物,看著枝頭最美的花朵,數著指尖流走的時光,就像看著自己的美麗在徒勞地開放,兀然地凋零,卻還是“佳期猶渺渺”一次次讓“結同心”的美夢幻滅,沈浸在知己難求、知音渺渺的痛苦裏。


縱觀薛濤一生的坎坷情路,其發出《春望詞》中幽怨哀傷而又無力無奈之感也就情有可原了,而這也與文章開篇提到的薛濤剛柔並濟的性格有著很大的關系。薛濤本事官宦之女,養尊處優,無奈世事變化無常,短短數月她就被迫入樂籍淪落爲風月場裏的歌妓。盡管如此,薛濤仍不改其潔身自好高風亮節的本質,以其詩文出彩贏得衆多名士追捧。隨後邂逅韋臯,有“女校書”之美稱,受盡寵愛;奈何耿直之氣高傲之風得罪了韋臯,被流放邊疆。讓人不得不感歎,在男權社會裏再有風骨才氣的女子還是得依附男人而生存,所以才有了後來的《十離詩》。就算是自貶身價,薛濤在流放途中還是發出了“聞說邊城苦,而今到始知。羞將門下曲,唱與隴頭兒。”的感慨,對防守邊疆士兵的艱苦生活寄以深切同情,又見這女子有著男兒般心懷天下的胸懷。之後邂逅了羁絆一生的男子元稹,本以爲是“才子佳人”好姻緣,怎料竟成“鏡花水月”空悲切。從此,薛濤隱居浣花溪旁,著上那女道服,制那薛濤箋,一生無伴到白頭。曾經紅顔如今白發,幾度蕭索在心頭。甯可同春天一同老去,也不願將就半分半毫。這就是薛濤。


作者簡介


薛濤,768~832,字洪度,唐朝長安人,生于大曆五年,卒于大和六年。

幼年隨父鄖流寓成都,八九歲能詩,父死家貧,十六歲遂墮入樂籍,脫樂籍後終身未嫁。後定居浣花溪。

知音律,工詩詞。創“薛濤箋”。薛濤正式集子叫《錦江集》,共五卷,詩五百余首,沒有流傳下來。後世各家所本的明本《薛濤詩》一卷,是從《萬首唐人絕句》等選本拼湊起來的。




薛涛制笺图图片



춘망사(春望詞) 

- 봄을 기다리는 노래 - 


설도(薛濤) 


一. 

花開不同嘗(화개보동상)  꽃이 피어도 같이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부동비)  꽃이 떨어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욕문상사처)  임이 생각하는 곳은 어디 메 일까?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  때 맞춰 꽃들만 피고 지는구나! 


二 . 

攬結同心草(람결동심초)  풀을 따서 한 마음으로 묶어 
將以遺知音(장이유지음)  내 노래를 아시는 님에게 보내야 겠다. 

春愁正斷絶(춘수정단절)  봄날의 시름은 이렇게 끊어 버렸지만 
春鳥復哀吟(춘조복애음)  봄새는 또 다시 슬피 우네요. 


三. 

風花日將老(풍화일장노)  꽃은 바람에 매일 시들어 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만날 기약은 오히려 아득하기만 하니 
不結同心人(부결동심인)  마음을 같이 묶지를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헛되이 풀잎만 묶었구나. 


四. 

那堪花滿枝(나감화만지)  어찌 견디리 꽃이 가득 핀 나뭇가지 
翻作兩相思(번작양상사)  오매불망 님 생각에 괴롭기만 하다. 
玉箸垂朝鏡(옥저수조경)  아침거울에 떨어지는 옥 같은 내 눈물 
春風知不知(춘풍지부지)  봄바람은 내 마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우리나라에 여류시인으로서 "황진이"가 있다면 중국에는 당나라때에 기녀로서 여류시인 설도(薛濤790-832)가 있었다. 설도의 자는 공도(洪度) 어렸을 적부터 시문(詩文)에 재능이 뛰어났었다.

설도는 실연한 사연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비분상심의 감정을 붓끝에 모아내어 시를 썼다.

도교의 사제로 불리웠던 그녀는 명문가의 후예였는데 선조는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우리에게는 원한이 맺혀 있는 설인귀(薛仁貴)라고 전해온다.


그녀의 생몰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두보가 죽은 해에 그녀의 나이는 서너 살 정도였다.

원래는 장안(長安) 출생이었지만, 사천성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한 부친 설운(薛郧)을 따라 성도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부친은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전사하게 되고, 곧 이어 모친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녀는 결국 악기(樂妓-기예(技藝)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고급 기녀)가 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보기 드문 재녀(才女)였는데, 음률과 시, 서예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용모 또한 매우 뛰어났다. 그녀에 얽힌 전설 같은 사랑이야기도 유명하다..


그 당시 사천절도사 위고(韦皋)라는 사람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를 자신의 교서랑(校書郞)이라는 직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여자에게 일찍이 그런 예가 없다며 반대하는 부하들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백거이(白居易), 원진(元鎭),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과 같은 당대의 거장들과 교류했다. 특히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

원진은 장래가 촉망되는 당대의 시인으로서 사천감찰어사로서 성도에 오게 되었는데, 설도는 나이가 자신보다 10살이나 연하인 원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아내가 있었던 원진(元鎭)은 설도와 며칠을 함께 지낸 후, 배를 타고 떠난 후 다시 찾지 않았다. 그 후 설도는 평생동안 독신으로 지냈다.


원진은 원래, 부친을 일찍 여윈 명문가의 미녀 최앵앵(崔鶯鶯)과 혼약을 정했으나 언약을 저버리고 장안의 권세가의 규수에게 장가를 들었다.

(이 이야기는 원진 스스로 쓴 당대의 유명한 소설 앵앵전(鶯鶯傳)에 실려 있는데, 앵앵전은 훗날 서상기(西廂記)라는 희곡의 주제가 되었고, 또 서상기는 우리나라의 춘향전(春香傳)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원진은 또, 당시 절강성 소흥의 유명한 명기였던 유채춘이라는 여자를 농락하여 자살토록 한 바도 있었으며, 그러고도 결국 재상의 딸과 결혼하여 출세한 인물인데 그러고도 설도를 만나 장래를 약속했다.

설도는 원진에 대한 그런 좋지 못한 그런 소문을 전해 듣고는 결국 그를 단념하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녀는 머리도 몹시 영리하여 설도전(薛濤箋)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종이도 발명하기도 하였다. 당대의 사람들은 백지(白紙)에 시를 써서 사람을 전송하는 것을 불길하다고 여겨 색깔있는 시전(詩箋-시 한 수나 간단한 사연을 쓰는 폭이 좁은 종이)이 성행했는데 설도는 완화계의 자신의 집 근처의 종이 공장들을 늘 살펴보고 연구하고는, 꽃물을 넣은 붉은 색의 아름다운 색종이를 만들어 자신의 시를 적어 사람들에게 보내곤 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이 몹시 청신하면서도 아름다워 설도전이라고 이름 짓고 다투어 소장하려고 하여 몹시 귀하게 되었다. 그 후로 황실에서도 사들이는 진품(珍品)이 되었다.


시성(詩聖) 두보는 성도의 서쪽 교외에 있는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시냇가에 옆에 초당(草堂)을 짓고 만년을 보낸 후 죽었다. 설도도 만년에 그 근처로 와서 음시루(吟詩樓)라는 집을 짓고 창포(菖蒲) 꽃과 대나무가 가득 심고 살았다고 했다.


청대에 이르러 설도의 슬픈 사랑과 넋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살던 곳에 망강루(望江樓)라는 누각을 세우고 그녀가 좋아했던 대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성도의 망강공원(望江公園)에 가면, 그녀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렀다는 설도정(薛濤井), 설도전을 만든 현장인 완전정(浣箋亭), 그 다락에 기대어 시를 짓고 설도전에 옮겼다는 강변의 음시루(吟詩樓) 초석이 있으며 그녀의 시(詩)에 자주 나오는 대나무 1백40여 종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녀는 생전에 500여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88 수만 전해지고 있다. 우리 가곡인 동심초는 그녀의 시 춘망사(春望詞) 4 수 중, 세 번 째 수를 번역한 것이다.



출처 : 열국연의

http://www.yangc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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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望詞 四首(춘망사 4수)/설도(薛濤)


(一)

花開不同賞 (화개불동상) :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 (화락불동비) :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想思處 (욕문상사처) : 묻노니 그대는 어디에 계신고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 : 때맞쳐 꽃들만 피고 지네


(二)

攬草結同心 (람초결동심) : 풀을 따서 한마음으로 맺어

將以遣知音 (장이유지음) : 지음의 님에게 보내려 하는데

春愁正斷絶 (춘수정단절) : 봄 시름은 속절없이 끊기고

春鳥復哀吟 (춘조복애음) : 봄 새들은 다시와 애달피 우네


(三)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랴는고


(四)

那堪花滿枝 (나감화만지) : 어찌 견디리 가지 가득 핀 저 꽃

煩作兩相思 (번작양상사) : 괴로워라 사모하는 마음이여

玉箸垂朝鏡 (옥저수조경) : 눈물이 주루룩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 (춘풍지불지) :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춘망사(春望詞) : 봄을 기다리는 노래


  - 설도(薛濤) : 당나라 중기의 여류 시인. 자는 홍도(洪度).

장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따라 촉의 성도에 옮겼고 詩作에 능했는데 붉은 종이에 글을 써서 설도전(薛濤箋)이란 유명한 종이 이름이 되었고 그녀가 설도전을 만들던 설도정(薛濤井) 유적이 성도의 망강고원 안에 있다. 450여편의 시를 썼고 현전하는 것은 90수, 모두 주옥 같은 시다.

             

   - 일장로(日將老) : 해가 기울려 하다. 해가 지려 하다.

   - 가기(佳期) : 좋은 시절, 즐거운 약속

   - 유(猶) : 오히려

   - 묘묘(渺渺) : 아득히 먼 모양, 멀고 먼

   - 동심인(同心人) : 마음을 같이 하는 사람. 연인

   - 공(空) : 헛되다.

   - 결동심초(結同心草) : 풀잎을 동심결(同心結)의 형태로 묶다. ‘동심결’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하나로 맺는다는 뜻이다.     

결동심(結同心)은 중국 고대에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의 징표로  비단띠를 허리에 두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부르는 ‘동심초’라는 노래는 시인 김억(金億)이 이 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시는 총 4수로 되었으며, 소개하는 부분은 제3수이다. 

많은 사람들이 설도의 춘망사는 몰라도  김억의 동심초는 알고 있으니 요즈음 하는 말로 ‘오리지널’은 몰라도 ‘짝퉁’은 알고 있는 셈이다.


출처 :

http://kma21.net/xe/culturenart/7346








唐朝著名女詩人薛濤與元稹無疾而終的愛情


唐朝著名女詩人薛濤和著名詩人元稹的愛情是中唐文藝界最出名的愛情之一,雖然這場愛情是無疾而終,但正因為沒有結果,反而更有「餘味」。


薛濤,是一個帶有傳奇色彩的唐朝女詩人。


薛濤與劉采春,魚玄機,李冶,並稱唐朝四大女詩人。卓文君、薛濤、花蕊夫人、黃娥並稱蜀中四大才女。流傳至今詩作有90餘首。


薛濤的父親薛鄖入朝為官,學識淵博,從小就教導薛濤讀書、寫詩。薛濤從小也是十分的聰慧,薛濤八歲那年,薛鄖在庭院裡的梧桐樹下歇涼,他忽有所悟,吟誦道:「庭除一古桐,聳干入雲中。」薛濤頭都沒抬,隨口續上了父親薛勛的詩:「枝迎南北鳥,葉送往來風。」她天分很高,讓父親又喜又憂。


父親薛鄖為人正直,於是在朝中得罪了權貴,被貶謫到蜀地,一家人只能從長安跋山涉水趕到了成都。千辛萬苦來到成都,沒過幾年,薛鄖就病逝了,那時候薛濤才14歲。


父親逝世後,母女倆的生活馬上就陷入了困境。薛濤沒辦法,只能在16歲的時候,加入樂籍,成為了一名營妓。


那時的官員們往往都是科舉出身,文化素質不低,要讓他們看得上眼,不僅需要美貌,更需要才藝、辭令和見識,而這正是薛濤的長項。身在娛樂場中,使得她與當時許多著名詩人都有來往,在這份名單中不乏像白居易、張籍、王建、劉禹錫、杜牧、張祜等詩壇領袖。薛濤作詩500多首,然而這些詩歌大多散失,流傳至今僅存90餘首,十分令人惋惜。


公元785年,中書令韋皋出任劍南西川節度使。在一次酒宴中,韋皋讓薛濤即席賦詩,薛濤神態從容地拿過紙筆,提筆而就《謁巫山廟》,詩中寫道:「朝朝夜夜陽台下,為雨為雲楚國亡;惆悵廟前多少柳,春來空斗畫眉長。」韋皋看罷,拍案叫絕。這首詩完全不像出自一個小女子之手。


一首詩就讓薛濤聲名鵲起,從此帥府中每有盛宴,薛濤成為侍宴的不二人選,很快成了韋皋身邊的紅人。


薛濤紅得發紫,不免有些恃寵而驕。前來四川的官員為了求見韋皋,多走薛濤的後門,紛紛給她送禮行賄,而薛濤「性亦狂逸」,你敢送我就敢收。不過她並不愛錢,收下之後一文不留,全部上交。雖然如此,她鬧出的動靜還是太大了,這讓韋皋十分不滿,一怒之下,下令將她發配松州,以示懲罰。


松州地處西南邊陲,人煙稀少,兵荒馬亂,走在如此荒涼的路上,薛濤內心非常恐懼。用詩記錄下自己的感受:「聞道邊城苦,而今到始知。卻將門下曲,唱與隴頭兒。」她開始後悔自己的輕率與張揚,於是將那種感觸訴諸筆端,寫下了動人的《十離詩》。


《十離詩》送到了韋皋手上,他的心一下子就軟了,於是一紙命令,又將薛濤召回了成都。這次磨難,讓薛濤看清了自己,歸來不久,她就脫去了樂籍,成為了一個自由身,寓居於成都西郊浣花溪畔,院子裡種滿了枇杷花。





公元809年三月,當時正如日中天的詩人元稹,以監察御史的身份,奉命出使地方。他久聞蜀中詩人薛濤的芳名,所以到蜀地後,特地約她在梓州相見。與元稹一見面,薛濤就被這位年僅三十一歲的年輕詩人俊朗的外貌和出色的才情所吸引。




薛濤的愛情之火一經燃燒,就極為熾烈。儘管她已經步入中年,但那種前所未有的震撼與激情告訴她,這個男人就是她夢寐以求的人,於是她便不顧一切,如同飛蛾撲火般將自己投身於愛的烈焰中。第二天,她滿懷真情地寫下了《池上雙鳥》,完全一副柔情萬種的小女子神態。


遲來的愛情讓薛濤感受到了從未有過的幸福,兩個人流連在錦江邊上,相伴於蜀山青川。那段時光,是薛濤一生最快活的日子。然而幸福總是最為短暫,這年7月,元稹調離川地,任職洛陽,細算起來,他們在一起的日子不過3個月而已。


分別已不可避免,薛濤十分無奈。令她欣慰的是,很快她就收到了元稹寄來的書信,同樣寄託著一份深情。勞燕分飛,兩情遠隔,此時能夠寄託她相思之情的,唯有一首首詩了。薛濤迷上了寫詩的信箋。她喜歡寫四言絕句,律詩也常常只寫八句,因此經常嫌平時寫詩的紙幅太大。於是她對當地造紙的工藝加以改造,將紙染成桃紅色,裁成精巧窄箋,特別適合書寫情書,人稱薛濤箋。才子多情也花心但薛濤對他的思念還是刻骨銘心。她朝思暮想,滿懷的幽怨與渴盼,匯聚成了流傳千古的名詩《春望詞》。


由於兩人年齡懸殊過大,三十一歲的元稹正是男人的風華歲月,而薛濤即便風韻綽約,畢竟大了十一歲。另外更重要的是,薛濤樂籍出身,相當於一個風塵女子,對元稹的仕途只有負作用,沒有正能量。對於這些,薛濤也能想明白,並不後悔,很坦然,沒有一般小女子那種一失戀便尋死覓活的做派。於是薛濤從此她脫下了極為喜愛的紅裙,換上了一襲灰色的道袍,她的人生從熾烈走向了淡然,浣花溪旁仍然車馬喧囂,人來人往,但她的內心卻堅守著一方凈地。



https://kknews.cc/history/vmabgzy.html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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